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형양 · 성고 전역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>비록 지금 군량이 부족하더라도, 과거 [[서초(초한쟁패기)|초]](楚)와 [[전한|한]](漢)이 형양(滎陽)[* [[허난성]] [[정저우시]] 싱양시.]과 성고(成皐)[* [[허난성]] [[정저우시]] 싱양시 스수이진.] 사이에서 싸웠을 때만큼은 아닙니다. >그 무렵 [[고제(전한)|유방]](劉邦)과 [[항우]](項羽)는 결코 먼저 물러서려 하지 않았으니, 먼저 물러서는 것은 곧 세력상 상대에게 굴복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. >---- >'''[[삼국지(정사)|정사 삼국지]](三國志) [[순욱]](荀彧) 전'''[* [[관도대전]] 당시 [[원소(삼국지)|원소]]군의 어마어마한 전력에 밀리고 군량까지 위급하자, 짐짓 퇴각할 각오를 하고 의견을 물어본 조조에게 순욱이 한 대답이다.] '''{{{+1 滎成之戰, 成皋之戰, 滎陽之戰, 汜水之戰 }}}''' [[중국]] [[초한전쟁]] 당시 [[서초(초한쟁패기)|초나라]](楚)와 [[전한|한나라]](漢)의 격돌, [[항우]](項羽)와 [[고제(전한)|유방]](劉邦)의 정면 대결이다. 형양전투(滎陽戰鬪)와 성고전투(成皋戰鬪) 등 세세하게는 나뉘지만 기본적으로는 거의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, [[팽성대전|팽성 전투]](彭城戰鬪) 이후 [[광무 대치]] 직전까지의 항우 - 유방의 초한전을 '''형양 · 성고 전역'''으로 설명한다. 형양 전투, 성고 전투, 사수 전투라는 검색으로도 이 항목에 들어올 수 있다. [[초한전쟁]]이 고대 중국 세계를 결정지은 대전이라고 한다면, '''바로 그 초한전쟁의 향방을 좌우한 전역'''이 성고와 형양의 사투다. 팽성대전 이후 파도처럼 밀려오는 항우의 공세를 유방은 성고와 형양을 기점으로 수성(守城), 도주, 외교, 반간계(反間計) 등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필사적으로 막아내었는데, 이 과정에서 '''죽어나간 장수들이 수두룩하고,[* 대부분은 항우에게 사로잡힌 후 [[끔살]] 루트를 타버렸다.] 상대편인 항우는 그럴 듯한 패배조차 한 번도 없었다.''' 그러나 결과적으로 항우는 형양, 성고를 넘어 유방의 본거지인 관중(關中)을 향해 진격하는 데 실패했고, 유방을 완전히 섬멸하지 못하는 지리한 우세만을 이어나가게 된다. 그리고 이 무렵, [[한신]](韓信)은 북방을 휩쓸며 [[한신의 북벌|초한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게 된다.]] 간단하게 말하자면 유방이 [[탱커]] 노릇을 하는 사이 한신이 [[데미지 딜러]]로 활약한 것. [[망치와 모루]] 개념을 적용하자면, 유방이 모루가 돼 공격을 받아내는 동안, 한신이 망치가 돼 전선 좌측면을 휩쓸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. 결국 최악의 시기를 버텨낸 유방은 기원전 203년, [[광무 대치]]를 기점으로 완전하게 세력 균형을 뒤집는 데 성공하고 만다. [[파일:/20120119_234/13269192910591zei1_JPEG/K-4_%282%29.jpg]][br]▲'''형양과 성고의 위치''' 형양-성고 지역은 낙양 동쪽의 정주([[정저우시]]) 일대로, 지도에 나오듯이 중원 지역의 교통의 요지이다. 이곳을 확보해야만 인근의 낙양은 물론이고 관중과 중원, 하북, 하남 일대로 뻗어나갈 수 있었다. 이곳에서 초와 한의 격전이 일어난 것에는 이유가 있던 것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